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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 모더니즘과 관련 철학자들의 입장 살펴보기

yes' 건축 도시 이론

by 도요새 공간 2019. 4. 30. 1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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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반적인 내용들은 포스트모더니즘과 건축이론(임기택)』을 읽고 정리한 내용들입니다 :)


포스트모더니즘이란 무엇일까?


우선 모더니즘과 모더니티의 관계에 대해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모더니즘은 모던적 상황에 따라 변화하는 정치, 경제, 문화, 하부구조의 변화상황으로 인해 발생하는 사회현상이며 모더니티는 그러한 변화상황에 대한 각종 표현과 재현양태에서 드러나는 방식에 대한 정신계의 흐름이다.(임기택, 포스트모더니즘과 건축이론 중에서) 하지만 이 모더니즘과 모더니티의 선후 관계를 따지는 것은 닭과 달걀 중 무엇이 먼저인가를 따지는 것과 같이 의미는 없다. 단지 모더니티와 모더니즘은 서로 영향을 주고 받게 되는 것이다.  포스트 모더니티와 포스트모더니즘의 관계 또한 이와 유사하게 바라 볼 수 있으며 즉, 생산과 소비의 자본적 속성이 변화함에 따른 공간적 표현적변화인 것이다. 


또한 이 Postmodernism의 'Post'를 어떤 시각으로 바라보느냐에 따라 그 의미가 달라질 수 있다. 

1. 脫 '탈'의 의미로 본다면 모더니즘을 벗어난다고 볼 수 있고

2. 以後 '이후'의 의미로 본다면 모더니즘의 이후 즉 연속적 의미로 바라 볼 수 있는 것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의 단어는 1970년대 찰스젱크스가 건축 비평 때 사용함으로써 이후 전세계적으로 사용되었다. 1972년 프루트 아이고의 폭파가 하는 시점에 찰스 젱크스는 이는 국제주의 양식은 사망했다고 했으며 또한 신인 건축가 로버트 벤츄리는 모던 유니버셜리즘을 반대했었다. 즉 이러한 과거를 지향하는 기억과 이미지로 돌아가며 급진적인 포스트 모던 이론이 등장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포스트 모더니즘의 특성은 보편화된 모더니즘 세계관의 '단조로움'에 대한 반동으로 볼 수 있으며 키치적인 요소들을 적극 활용함으로써 모더니즘의 이상학적, 엄걱함과 대비되는 특성들을 나타낸다. 



포스트 모더니즘과 관련된 철학자들


위르겐 하버마스, 료타르, 장 보드리야르가 대표적이다. 우선 요약적으로 말하자면 하버마스는 모더니티 미완에 대하여 의사소통의 합리성을 통해 보완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으며 료타르는 이와 반대로 포스트모더은 거대담론의 불신이며 즉 모더니즘을 벗어난다는 시각이었다. 장 보드리야르는 이미지의 현실지배현상에 집중하면서 시뮬라르크, 시뮬라시옹 현상에 대해 논한다. 


특히 위르겐 하버마스와 료타르 두명의 논쟁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둘은 계몽의 변증법』에서의 아도르노의 문제의식을 어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다른 의견 제시하였다. 계몽의 변증법에서 던지는 화두인 "왜 인류는 진정한 인간적 상태에 들어서기보다 새로운 종류의 야만상태에 빠졌는가?". 이는 도구적 이성을 중심으로 한 결과 동일서으이 원리에 따른 철저한 결과(나치즘)에 대한 비판을 하는 것인데, 아도르노는 이러한 도구적 이성의 만연을 지양할 수 있는 계기를 예술에서 발견한다. 하버마스는 이러한 아도르노의 문제의식에 대해 해결의 가능성을 사회학에서 찾는다. 포스트모더니티는 모더니즘 이후의 연속적인 현상이며 즉 모더니티의 진행과정으로 그 특성들이 발전되면서 강화되는 것이라고 보았다. 그렇기 때문에 보편성과 계몽주의를 신뢰하여 계속적으로 모더니티의 이성적 과정이 진화해 나갈것이라고 본 것이다. 그 해결의 가능성은 도구적 이성이 아닌 의사소통적인 이성이며 즉 이성도 발전되어 강화된 특성 (진실성, 진리성, 이해가능성, 규범적 정당성)을 중심으로 말한다. 이러한 의사소통이 일어나는 공간은 사회적 공론장인데 이전에 프랑스의 살롱이나, 영국의 커피하우스와 같은 부르주아들이 진지한 정치적, 문화적 토론이 이루어졌던 공간들을 말한다. 


이상적인 담화상황은 이러한 공론장에서 이루어지는 커뮤니케이션 행위이며 이러한 이상적인 의사소통의 상황을 통하여 상호간의 이해와 화해를 제시함으로써 변증법의 과정에서 보편적 종합으로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 


료타르는 이러한 하버마스의 대안에 대해 반대하며 보편적 합의 자체를 불신한다. 그는 포스트 모던은 거대담론의 불신이며 모던과 자본주의 질서의 대안적인 의미로 보았기 때문이다. 보편적 합의를 위한 거대서사는 반드시 전체주의적 폭력성으로 귀결되기 마련이며 그것보다는 불일치와 차이를 강조, 조화보다는 개별적인 인간의 개성을 중시했다. 

맥락이 상반된 논의는 처음부터 상호간 이해가 불가능하며 굳이 이해를 위해 대화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이것의 강조는 결국 전체주의의 폭력으로 이어질 수 밖에 없으며 그것이 나치즘을 낳았고 자본의 무제한적인 수행성으로 인한 인간의 소회를 낳았다. (안성찬, "이성과 감성의 평행선", 유로서적, 2004)

그래서 료타르는 아도르노와 같이 도구적 이성의 만연을 극복하는 계기를 예술에서 발견하고자 했다.

그의 마지막 태도는 사실 현실적으로 올바른 대처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지만 보편적 합의를 불신하는 부분에서는 하버마스보다는 조금 더 동의가 되는 바이다. 하버마스의 주장은 그대로만 된다면 정말 유토피아적인 현실이 되겠으나 사실 현실은 료타르가 말하는 것과같이 맥락이 상반된 논의는 처음부터 상호간의 이해가 어려운 것에 고개가 끄덕여 진다. 물론 하버마스의 말처럼 진화된 의사소통의 과정이 일어난다면 참 다행이겠지만 말이다. 이익이 눈앞에 오가는 상황에서 사람들은 과연 이성적으로 그렇게 행동할 수 있을까?


장보드리야르는 포스트 모더니즘의 '기호적, 상징적' 부분에 주목했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시대에서는 이미지가 현실을 재현하는 것을 뛰어넘어 현실을 지배하고 있다고 주장하며 이러한 현상을 시뮬라르크, 이러한 시뮬라르크가 모인 세상이 시뮬라시옹 이라고 한다. 자본사회 아래의 포스트 모던화된 사회는 이미지와 기호의 홍수시대이며 이는 욕망을 더욱 발화시키고 - 결핍을 극대화시키며 - 더 큰 욕망을 불러일으키는 현상의 반복인 것이다. 

정말 그런 시대인 것이다. 아이폰과 충전기만 있으면 나는 하루종일 방 안에만 있을 수 있다. 꼼짝없이 방 안에 있어서 세상과 단절된 것 같지만 사실은 더 노출되고 있는 셈이다. 쇼핑몰에서 한 번 클릭한 것들은 이후에 내가 어떤 사이트에 들어가도 옆에 팝업창으로 계속 해서 광고가 뜬다. 나는 잊어버렸지만 핸드폰은 나의 발자취를 기억하고서는 다시 세뇌시켜주고 반복해서 보여주다가 나의 욕망을 불러일으키고 나도 모르는 사이 결제창 앞에 있다... 이글을 보고 있는 당신도 그렇지 않은가 ?! 


아무튼 장보드리야르는 심지어 쿠웨이트 침공을 방송한 CNN의 장면을 이렇게 묘사하기도 했다. 

'그 전쟁은 일어나지 않았다.' 

사람들은 티비 속에서 CNN이 중계하는 전쟁 장면을 이미지 속의 전쟁이라고 받아들여지는 시대이며 이러한 전쟁의 참혹함 및 현실을 이해하지 못하고 기표자체가 현실을 대체하게 된 것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즉 포스트모던 시대의 기호의 힘은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 존재하는 것처럼 생각되거나 아예 생겨나서 강력한 영향력을 미치게 되는 것이다. 


포스트모더니즘과 관련된 건축적 특성에 대한 내용은 다음 포스팅에서 이어나가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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